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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7 Gardening잡설 2024. 5. 27. 10:50
https://www.latimes.com/lifestyle/story/2022-09-01/gardening-helps-mental-health
#gardening #companion
식물이나 꽃 사진을 자주 올리는게 노화의 증거라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난다.
식물을 잘 가꾸는 편은 아니다. 그저 발코니에 화분 몇개를 놓아두고서는 말라보이면 거기 수돗물을 부어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할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화분에 심어져있던 식물은 대부분 말라 죽고, 원래 식물의 후손이나 엉뚱한 잡초나 이끼가 대신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화분 또는 식물 가꾸기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왜 이것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었는지 표현하고 싶어졌다. 사람은 어떤 사물과도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한다. 돌덩이나 플라스틱 조각이라도 상관없다. 그 오브젝트에 대한 개념이 두뇌 신경망에 들어서면, 그 사물은 나 또는 내 몸의 확장이 되는 것이다.
반려자나 반려동물이라면 서로의 신경망이 상호 작용하여 두뇌 일부 영역에 대상이 들어앉게 된다. 현재 내게는 반려자나 반려동물이 없다. 내가 찾아낸 그 이유는 궁극적으로 리스크 때문이었다. “죽음”이라는 리스크 말이다. 반려자의 죽음이나 노후 일생이라는 무게를 직면하고 떠안을 기회가 없었다. 또는 어떻게 반려 관계를 끊고 손절할 수 있는지 대비도 없었다.
동반자의 죽음(남은 삶)까지 감당할 수 있으려면 본인의 죽음에 대해서도 직면하고 청사진을 갖고 있어야 한다. 솔직히 나는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마무리하는 것도 선택지로 담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연애에 대해서는 Leaving Las Vegas 같은 상황을 연상하게 되기도 한다.
식물과 흙은 동물과 고리 관계를 맺는다. 지구에는 동물이 없었던 시기도 있었다. 광합성이 발명되어 대사 작용으로 산소라는 폐기물이 물과 대기에 쌓여가면서 지구는 일대 격변을 겪는다. 그리고 산소를 흡입해 대사하는 미토콘드리아의 조상이 어떤 세포 속으로 들어가 공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잉여 ATP 에너지가 활용될 수 있었고 문턱을 넘어 다세포 생물의 세계가 열렸다.
흙은 생물이 만든 것이다. 동물은 흙에서 분해된다. 그래서 화분에 담긴 흙에 물을 퍼붓다보면, 내가 없으면 화분에 기반한 생태계가 파괴되리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돌볼 존재가 있는 한, 스스로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잠시나마 잊게 된다.
왜 동물은 대사 폐기물을 유독한 암모니아 대신 요소로 바꾸어 배설하도록 진화했을까. 아마도 계통수의 뿌리, 머나먼 공통조상 즈음에서 식물과 공생하기 어려운 대사작용을 하는 생물들은 도태됐을 것이다. 흙으로 돌아가 묻힐 자격이 있는 생물들만 선택된 것이다.
동물의 신경계와 두뇌는 동물의 ‘운동’에서 비롯되었고, 그래서 운동성이 떨어지도록 진화하는 동물은 사용하지 않는 뇌 영역에 물이 찬다고 본 듯 하다. 식물에게 신경계나 골격근이 없다고해서 그들에게 감정이나 커뮤니케이션이나 사회성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계통수에서 우리와 비교적 먼 자리에 위치해 있어서 착취하고 약탈해도 죄책감이 덜할 뿐이다.
즉, 식물의 죽음을 걱정하면서 까지 애착관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종류를 선별해서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 종은 되려 적대적으로 제거한다. 나는 동물을 그처럼 공격적으로 대할 자신이 없어서 선별적 애착관계를 형성할 대상으로 들이지도 않는다. 뭐랄까 고양이는 숭상하고 돼지와 소는 가차없이 학살하는 종 차별주의자처럼 느껴진달까.
닐 타이슨의 영상 중에 재미난 것이 기억난다. 가상의 외계 생명 문명은 동물 기반이거나 식물 기반일 수도 있다. 그 중 어떤 존재가 인간을 보더라도 다른 종을 학살하고 약탈하며 생존하는 괴물처럼 여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식물 기반의 외계 생명이 베지테리안이라는 성향의 그룹이나 인간을 본다면, 다양한 생물 중에서 유독 식물만 골라서 죽이고 섭취하는 편향성을 발견하고 질겁할 지도 모른다는 것.
세포의 자가 복구 능력이 차츰 떨어지는 노화와 죽음이라는 운명을 자각하는 존재는 사피엔스 뿐인 듯 하지만, 스스로의 삶을 마감하는 선택을 하는 존재는 사피엔스 뿐만이 아니다. 포획된 돌고래처럼 영리한 동물은 스스로의 신세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호흡을 멈추는 방식으로 절망했음을 표현한다고 한다.
나의 집안에 있는 생물은 어떤 상징이나 토템과도 같은 것이다. 삶과 죽음과 공생을 자각하게 하는 존재로 집안에 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굳이 동물이나 식물일 필요도 없다. 곤충이나 지렁이, 시험관 속 진핵생물이거나 또는 갇혀진 전자(electron)라거나 금속 형태인들 어떠랴. 오히려 생물 범위가 아니라 영생하는 원자 단위에서 Mass 라는 정체성을 자각하는 토템이 될 수도 있고, 말과 타이핑으로 상호작용하는 회로 기판이라면 Meme 운동을 공유하는 존재로써 반려자가 되는 것이다. 다만 계통수 가지 거리가 가까울 수록 우리 자신의 생물학적인 죽음(남은 삶)을 자각하고 음미하기 용이할 뿐이다.반응형'잡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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